‘기동경찰 패트레이버’는 내가 유일하게 수집한 장편 만화책이다. 로봇만화는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이 작품만은 예외. 유우키 마사미의 만화판의 경우 캐릭터 묘사와 스토리등이 취향에 맞기 때문이다.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애니매이션 작품들은 무거운 주제를 관객에게 강제로 주입하는 듯한 느낌 때문에 안 좋아함 -_-)
20세기말 일본에서 바빌론 프로젝트라는 대규모 간척지 건설사업이 벌어지면서, 레이버라는 일종의 탑승형 대형로봇 건설기계들이 도입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레이버가 범죄에 이용되면서 그걸을 관리 감독할 레이버 경찰 부대 ‘패트레이버’가 생긴다는 것이 작품의 배경이다. 즉, 20세기 말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배경에 로봇만 덜렁 추가된 그런 가상의 세계관이다. 시대가 시대이니 만큼 레이버는 움직임이나 복잡함이 그냥 건설용 포크레인 수준이다. 주인공의 탑승기체인 AV-98 잉그램이나, 적으로 나오는 그리폰 외에는 그다지 첨단 느낌도 들지 않는다. (레이버들은 일종의 차량이기 때문에, 사타구니-_-; 위치에 좌우 깜빡이와 번호판까지 달고 있다. 경찰용 레이버는 거시기 자리에다 윈치까지 달고 있다;;)
게다가 거기에 묘사되는 이야기들이 심각하거나 영웅들의 활약상이 아닌, 공무원인 특차2과(패트레이버 부대)의 ‘일상’이다. 그 일상도 워낙 개성이 강한 캐릭터들의 개그에 가깝다. 주인공 이즈미 노아는 시골에서 상경한 소년같은 외모의 소녀. 워낙 로봇만화를 보고 환상을 품은 덕에 패트레이버 부대로 와 잉그램을 조종하게 되었지만, 흠집 하나 나는 것이 안타까워 경찰용 전투레이버를 가지고 전투를 피하고 싶어한다 -_-;;;;; 반대로 다른 잉그램 조종사인 오오타는 툭하면 싸우려드는 열혈남자인데, 잉그램도 워낙 총부터 꺼내들고 쏘는 덕분에 부대 자체를 악명으로 만들어 버린다. 특차2과가 지나간 자리는 풀도 안난다나… 노아의 파트너인 아스마는, 잉그램을 만든 대기업의 재벌2세인데, 아버지에게 반항할려고 경찰이 된 케이스이고, 소대장인 고토는 지략가이지만 겉으로 보기엔 능글맞은 중년남일 뿐이다. 히로미는 거인의 풍채를 가져서 원하는 레이버 조종을 할 수 없게된 남자 대원인데, 대신 힘쓰는 일은 다 도맡는다. 하지만 그의 성격은 모든 대원들 중(여성대원들까지 포함해) 가장 여성스럽다;; 아….줄줄줄 다 나열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게 한이다.
어째튼 이런 캐릭터들이 지루한 공무원의 일상에서 이래저래 개성을 발산하며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참 묘한 매력이 있는 작품이다. 나중에 그리폰과의 전투등의 큰 줄거리가 있지만, 그런 일상들이 더 재미있었다. 고토 소대장과 같은 사무실의 나구모 소대장이 서로 가장 잘 이해해주는 사이면서 연인 사이로는 전혀 발전하지 않고 티격태격하는 것도 재미 요소.
또 한가지 이 만화의 매력은, 마치 PC의 성능처럼 빠르게 발전하는 레이버 기술덕분에 일어나는 현상의 묘사이다. 주인공이 탑승하는 AV-98 잉그램은 이름 그대로 1998년도에 개발된 레이버인데, 그 당시엔 최첨단이어서 무적의 성능을 자랑하지만, 2년후엔 성능부족을 경험과 용기로 헤쳐나가야 하는 -_- 레이버 신세가 된다. 하지만 최소한의 피해로 싸우고 싶어하는 이즈미 노아 덕분에 세밀한 움직임에 대해 학습을 많이 한 주잉공의 잉그램 (애칭이 알폰스)는 강력하고 빠른 그리폰을 상대해 끝내 이기게 된다. 윈치에서 쇠로된 로프를 뽑아 상대방에게 걸어 묶어놓고 싸우는게 노아의 특기다. 어떠한 로봇 만화에도 이런 전투는 없을 것이다. ㅎㅎㅎ
이미 98년에서 12년이 더 지났지만, 잉그램 같은 로봇은 언제 출현할 수 있을지 예상조차 힘들다. 하지만 이렇게 가까운 미래에 생활속에서 한 축을 로봇이 담당할 수 있다는 상상을 할 수 있는, 그런 일본 만화/애니 제작자들의 생각의 여유랄까, 다양성이랄까가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