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겨울엔 이상하게 영국 영화를 많이 보게 되는군요. 원스는 우리나라에서 의외의 성공을 거둔 영국의 초저예산 인디 영화입니다. 우리나라에서 20만명 이상 관객을 동원해서 인디영화 흥행기록을 세웠습니다. 절반정도는 크리스마스 로맨스 영화를 기대하고 갔다가 낚인거 같지만요 ㅎㅎㅎ
원스는 스토리가 재미있거나 멋있거나 아름답지도 않고, 홈비디오로 찍은 듯 어색한데다가, 영화의 90%를 차지하는 노래는 듣기 좋은게 아닌 아픈 마음을 노래하는 것이고, 스튜디오에서 다듬어진 녹음도 아닙니다. 주인공들은 이별을 한 상태이지만, 아예 헤어진것도 아니고, 서로 끌리지만 마음 이상을 나누지도 않습니다. 배우들의 외모나 연기력은 그냥 일반인 섭외 영화 수준입니다.
그러면서도 영화는 왠지 흡인력이 있습니다. 소매치기를 쫒아가더니 서로 지쳐서 동전 주워주는 장면이나, 은근히 미소 짓게 하는 인심 좋은 주변 사람들이나(특히 주인공에서 돈을 대여해주던…음악의 꿈을 가졌었던 상담원…킹왕짱), 괜히 여주인공에게 찝적거렸다가 후회하게 되는 장면, 피아노를 선물하는 장면 등, 영화는 뭔가 소시민적이고 끈적끈적하면서 풋풋한 그런 느낌을 내내 줍니다.
최근엔 알면서도 가식적인 이미지와 거짓 감동에 속아주어야 하는 영화나 음악만을 보고 들어서 그런지, 이런 재미와는 담쌓은 영화가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보고나서 잊기전에 감상문 쓰려고 했는데, 이제야 쓰는군요.
영화 식객을 보았다. 타짜와 같이 허영만 화백이 수년간 연재하며 걸작으로 평가받는 동명 만화를 영화화 한것이다. 만화 식객은 요리 고증과 자료조사를 통한 세밀한 한국 음식의 표현, 라면이나 부대찌개등도 한국음식으로 치는 자유로운 사고, 경쟁이나 대결구도에 얽매이지 않고 승부를 무의미하게 하거나 초월해버리는 스토리와 주제, 그리고 주인공들의 재치있는 코믹요소가 어우러진 작품이다.
영화 식객의 경우는 만화 식객과 스토리가 매우 다르다. 운암정에서 경쟁에 밀려난 성찬과 기자 진수, 그리고 오봉주라는 요소는 그대로 가져갔으나, 숙수의 칼을 상품으로 걸고 벌이는 대회가 가장 핵심 줄기이다. “최고의 맛은 어머니 만큼이 많다”라는 주제가 소믈리에 같은 어색한 과장법을 연발하며 승부를 가르는 심사위원에 의해 빛을 잃는다. 가장 아쉬운것은 만화에서는 승부에 집착하지만 “음식가지고 장난한 내가 졌다”라면서 부하의 실수까지도 자신의 패배로 인정하고 깨끗하게 뒷모습을 보이는 쿨가이 오봉주가 영화에서는 이기기 위해 라이벌의 음식에 복어알의 독까지 넣는 더러운 사람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임원희라는 희극 배우를 오봉주로 캐스팅해놓고 어설픈 몸개그로 캐릭터를 가볍게 만든것도 참 문제다. 웃길려면 제대로 웃기던가. 만화의 핵심 코믹 캐릭터인 거지(?) 할아버지, 그리고 보광 레스토랑 식구들이 사라진것도 아쉬움이다.
하지만, 원작과 다르게 만드는것은 허영만 화백도 바라는 일이라고 하니, 그것만가지고 탓하긴 뭐하다. 하지만 더 큰 탓이 있다. 이 영화에서는 황복어의 알을 가지고 짜릿한 맛을 내는 것을 사람의 생명을 놓고 칼끝에 놓는 위험한 짓이라고 하고 있다. 하지만 결국 영화 자체도 감정이라는 ‘양념’으로 말초신경을 자극하려고만 하는 위험한 짓을 하고 있다. 민족주의와 반일감정이라도 낚으려는 듯한 일제시대의 비극이라는 미끼와, 일본인의 좀 오버스러운(?) 사죄와 회상, 스승의 자결, 제자의 죄의식, 선조에 대한 오봉주의 잘못된 생각과 집착, 제대로된 고수들의 대결이 아닌 조선대표 서민음식과 일본 관료가문의 전래음식(?)의 승부가 되어버린 어이없는 마지막 대결, 성찬이 기르던 소의 슬픈 희생, 사형수 이야기까지… 영화는 맛과 향기의 향연이 아닌 눈물의 향연으로 만들려고 꾸준히 시도한다. 상업영화니까 그렇게 만든거겠지만 마치 선생 김봉두의 마지막에서 억지 눈물을 자아내게 했던것같은 거북함은 어쩔수 없이 느껴진다. 그것도 마지막이 아닌 영화 내내.
‘양념’이 잘못되어 요리는 좀 어긋났지만, 이 영화의 ‘재료’는 그야말로 최상급이다. 황복회, 쇠고기 정형, 고기 굽기, 숯이야기, 사형수와 고구마등의 이야기가 원작 팬들에게 큰 재미를 준다. 배고픈 채로 보면 미칠거 같은 화려하고 맛깔나는 음식들, 청각을 자극하는 도마질소리와 탕이 끓는 소리, 원작과 느낌이 무척 닮은 배우들도 큰 점수를 받을 부분들이다. 마지막에 허영만 화백의 카메오 등장도 놓치면 안된다.